11 밥 아카데미 2015-12-29 2,350
성경배경이야기 10. 소제 이야기

눈물겨운 소제 이야기 I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지극히 아끼고 배려하셨다는 흔적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본성 가운데 가난한 자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아끼셨다면 오늘날 교회의 본질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 존재해야 한다. 그 중 특히 성전의 제사법에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성품이 잘 드러난다. 오늘은 소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소제(코르반 민하)란?

성전 제사법에서 소제(코르반 민하)란 모든 곡식가루로 드려지는 모든 제사를 의미한다. 그래서 보릿가루로 드리는 초실절 제사도 소제이고 진설병도 소제며 매일 상번제 때 드리는 대제사장의 12개의 빵도 소제다. 이렇게 곡식가루로 드려지는 모든 소제들 가운데 우리 눈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소제는 역시 가난한 자가 속죄의 제물로 가져오는 소제다.

 

2. 가난한 자의 소제는 ‘영혼’(네페쉬)이라고 표현한다.

가난한 자가 속죄제물로 가져오는 곡식가루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가끔 “왜 하나님은 피가 섞이지 않은 곡식 가루를 받으면서도 사람의 죄를 용서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레위기 2장 1절에서 소제를 가져오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누구든지...’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이것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를 쓰지 않고 ‘영혼’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네페쉬(נפש)’를 사용한다. 그 이유에 대하여 유대 랍비들은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레위기 5장 11절에 의하면 가난한 자로서 속죄 제물로 곡식을 가져오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그의 힘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실상은, 곡식보다는 비둘기 두 마리의 가격이 더 저렴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자는 곡식가루보다도 비둘기를 가져오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자들이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올 수 없었던 이유는 비둘기는 돈을 지불하고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돈 한 푼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를 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대해 레위기 5장 11절에서는 ‘그 힘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거든’이라는 말로 표현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곡식은 비둘기 두 마리보다도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들이 이 곡식을 속죄 제물로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 모아 온 가족이 그날그날 먹고 살기위해 준비해 둔 것으로써 이 곡식은 자기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의 생명이 달려있는 귀중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죄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가족들의 생명이 달려있는 곡식임에도 불구하고 속죄제물로 기꺼이 가져온다는 것이다. 결국 그 곡식제물을 가져 올 때는 그 안에 모든 가족들의 생명을 다 담아서 가져온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소제에는 생명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영혼을 의미하는 ‘네페쉬’라는 단어로 쓰였고 또한 가난한자의 속죄 제물에는 피가 담겨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생명을 받은 것처럼 인식되어 속죄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Chumash. Vayikra 2:1)

 

3. 기름도 유향도 넣지 마라.

성전 제사법에서 기름이나 유향은 그 사람의 행위에서 명성과 본받을 만 한 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소제물들에는 기름이나 유향을 넣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난한자의 속죄 제물에는 기름이나 유향을 넣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5;11)


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레 5:11] 

 

그 이유는 기름과 유향의 상징에 비추어 생각하면 당연하고 명료하다. 죄를 지은 그의 행동에서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점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측면도 있다. 속죄 제물로써 곡식 가루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가 기름과 유향을 준비하려면 역시 돈을 지불하고 구입해야만 하는 경제적인 부담을 안겨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의 속죄제물은 고운가루 소제를 드리되 기름과 유향을 놓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경직되고 딱딱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이렇게 가슴 저리게 배려하시고 사랑하셨다면 그분의 백성 된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